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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절할 것만 같은 '벤 스틸러'씨

단발머리를한남자 2014. 4. 2. 16:58

지하철에서 내려 1층으로 통하는 계단을 향해 걸어가고 있었다. 

통로까지는 약 10m 정도의 거리였는데 저 멀리 건너편에서 걸어오는 한 남자가 시선에 들어왔다. 외국인이었다. 외국인을 처음 보는 것도 아닌데 굳이 시선이 간 이유는 내가 아는 영화배우 누군가와 닮은 모습이었기 때문이다. 

얼마 전 개봉했던 영화 '월터의 상상은 현실이 된다'의 '벤 스틸러'씨와 비슷했다. '벤 스틸러'씨가 다이어트를 한다면 저렇지 않을까 싶은 모습이었다. "어떻게 아셨어요. 사실은 동생이에요."라고 말하면 믿을 정도로 말이다. 


계단 입구를 3m쯤 놔두고 잠시 멈춰 섰다. 사람들이 한꺼번에 계단에 몰려서, 시간을 두고 잠시 뒤에 올라갈 생각이었기 때문이다. 계단엔 왼손엔 지팡이를 오른손은 난간을 붙잡고 천천히 올라가는 어르신 한 분이 눈에 띄었다. 느렸지만 꼬박꼬박 한 계단씩 올라가는 중이었다. 

부끄럽지만 난 이때까지 별생각이 없었다. 그냥 평범한 풍경이었기 때문이다. 어르신이 올라가고 그 뒤를 따라 올라가다 옆으로 추월해서, 가던 길을 바삐 걸어가는 사람들. 늘 있는 평범한 모습이었다. 


그때 목소리가 들렸다. 

"도와드릴까요". 

짧은 문장이었지만 분명히 들을 수 있었다. 한국사람이 낼 수 있는 숙달된 발음이 아니어서 더 귀에 선명하게 들렸는지도 모르겠다. 바로 전에까지 "아, 벤 스틸러다"라고 생각했던 그 외국인이 건넨 목소리였다. "메이아이 헬프 유"도 아니고 "도와드릴까요?"라니. 무척 뜻밖의 상황이었다. 놀라운 나머지 내 귀를 의심할 만큼. 

그리고 평소 선한 이미지의 '벤 스틸러'씨를 생각하다가 그의 동생이(?) 보여준 친절을 보면서 "역시 좋은 사람이었어"하는 엉뚱한 생각을 하는데 갑자기 나 자신이 부끄러워졌다. 


외국인이 보기에도 노인이 무척 힘겨워 보였나 보다. 

내가 먼저 나설 수도 있었을 텐데 난 그러질 못했다. 아무런 생각이 없었기 때문이다. 난 그저 이제 계단을 올라가서 지상으로 나가야겠다는 생각뿐이었다.

사실 나도 알고 보면(?) 참 친절한 사람인데 가끔 무척 모질게 굴 때가 있다는 게 문제였다. 이때가 그랬다. 밥때를 넘겼을 때, 또는 서너 가지의 일을 동시에 처리해야 해서 머릿속에서 타임테이블이 복잡하게 굴러갈 때, "나도 다리가 아파 죽겠으니 자리 양보는 꿈도 꾸지 마쇼" 라는 방어자세로 꿋꿋하게 버틸 때 등등이 그렇다;;; 

고쳐야지. 

조금씩이라도. 

고칠게요. 스틸러씨-_-;;;

 

다른 사람도 아니고 외국인을 통해, 잠시 잊고 있던 '예의'에 대한 생각을 해본 하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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